오스트리아

외스터라이히 공화국
Republik Österreich
Flag of Austria.svg Austria Bundesadler.svg
국기 국장
표어 없음
국가 산의 나라, 강의 나라
Austria on the globe (Europe centered).svg
수도 북위 48° 12′ 32″ 동경 16° 22′ 21″ / 북위 48.208889° 동경 16.3725°  / 48.208889; 16.3725
빈는 오스트리아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이다
정치
정치체제 공화제, 민주제, 입헌제, 연방제
이원집정부제¹
대통령
연방총리
부총리
알렉산더 판데어벨렌
브리기테 비어라인
공석
역사
독립  
 • 독립 나치 독일로부터 독립
1945년
지리
면적 83,879 km2 (115 위)
내수면 비율 1.7%
시간대 CET (UTC+1)
DST CEST (UTC+2)
인문
공용어 독일어
지역어 슬로베니아어, 크로아티아어, 헝가리어
인구
2015년 조사 8,579,747명 (95위)
인구 밀도 100.3명/km2 (107위)
경제
GDP(PPP) 2014년 어림값
 • 전체 $3869억 (45위)
 • 일인당 $51,183
GDP(명목) 2014년 어림값
HDI 0.895 (18위, 2012년 조사)
통화 유로2 (EUR)
기타
ISO 3166-1 040, AT, AUT
도메인 .at
국제 전화 +43
1 내각제로 분류하기도 한다.
2 2002년까지는 실링을 사용했다.

오스트리아 공화국(독일어: Republik Österreich 레푸블리크 외스터라이히[republiːk øːstɐraiç][*]), 줄여서 오스트리아(독일어: Österreich 외스터라이히[øːstɐraiç][*])는 중앙유럽 알프스 산맥에 있는 내륙국이다. 9개의 연방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수도이자 최대 도시는 이다. 북서쪽으로는 독일이 있고, 북쪽에는 체코 공화국, 북동쪽에는 슬로바키아, 동쪽에는 헝가리가 있으며, 남쪽에는 슬로베니아이탈리아, 서쪽에는 스위스리히텐슈타인이 있다. 오스트리아의 면적은 83,879 km2 이며, 인구는 약 9백만 명 정도이다. 공식 언어는 독일어이나,[1] 실제로 국민들은 여러 종류의 방언들을 사용한다.[2]

오스트리아는 976년 경 변경백국으로 처음 등장하였으며, 이후 오스트리아 공국, 오스트리아 대공국으로 발전하였다. 16세기에 오스트리아는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왕가들 중 하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로 자리잡으며 점차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끼쳤고,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국력을 꾸준하게 키워나갔다. 19세기 초에 이르자 오스트리아 제국이 세워졌으며, 독일 연방의 주도국으로 자리매김하였으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하였다. 1867년에는 헝가리와 동군연합을 통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세웠다.

오스트리아는 사라예보 사건에서 페르디난드 대공이 암살당한 직후,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시기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결국 오스트리아는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전후에는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들어섰다. 처음에는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을 세우려 하였으나, 승전국들은 이를 지지하지 않았고 결국 1919년에 세워진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이 공식적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계승국으로 인정받았다. 1938년에 오스트리아 출신의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지도자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트리아를 나치 독일에 합병하였다. 1945년에 나치가 패망한 이후에는 오스트리아도 잠시 동안 연합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곧 오스트리아 제2공화국이 세워져 주권국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의회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으며, 직접선거를 통하여 선출된 대통령이 국가원수이며, 총리가 행정부의 수반이다. 오스트리아의 주요 도심지에는 빈, 그랏츠, 린츠, 잘츠부르크, 인스부르크 등이 있다. 오스트리아는 1인당 GDP로 세계 20위 안에 늘 들 정도로 부유한 국가이며, 삶의 질도 굉장히 높은 수준이며 인간개발지수도 세계에서 20위를 차지한 바 있다. 또한 수도인 빈 또한 그 수준이 높고 삶의 질이 높아 세계적인 척도가 될 정도이다.[3][4]

오스트리아 제2공화국은 1955년에 중립을 선포하였다. 1955년 이래 UN의 회원국이었으며, 1995년에는 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 OECD인터폴의 창립국이며, 1995년의 솅겐 협정에도 조인하였고 1999년에는 유로화를 도입하였다.

독일어의 오스트리아 명인 Österreich는 '동쪽의 영토'를 뜻하는 고대 고지 독일어 Ostarrîchi에서 기원한다. 많은 언어에서 쓰이고 있는 Austria는 이를 라틴어화한 이름이다.

중세

한때 전 유럽 세계를 주름잡았던 로마 제국이 쇠망하고 난 이후, 유럽에는 슬라브족, 아바르족, 훈족 등 이민족들이 끊임없이 침략하였다. 이후 프랑크족의 왕이었던 샤를마뉴 대제가 788년 경에 혼란스러운 유럽 일대의 질서를 일부 다잡았고, 기독교를 전역에 포교하며 세를 넓혀갔다.[5] 현재 오스트리아 지방은 동프랑크 왕국의 일부였는데, 오토 2세바벤부르크 가문의 레오폴트 1세에게 976년에 오스트리아 변경백의 지위를 내렸고, 이때부터 오스트리아 변경백국은 안동안 바벤부르크 가문의 통치를 받게 된다.

‘오스트리아’라는 지명은 996년에 작성된 바벤부르크 가문 관련 문서에서 최초로 등장한다. 1156년에는 신성로마제국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가 오스트리아를 공작령으로 승격하였고, 1192년에는 바벤부르크 가문이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공작위를 동시에 획득하면서 그 세를 점점 넓혀갔다. 그러나 1246년에 프리드리히 2세가 헝가리와의 전쟁에서 전사하면서 바벤부르크 가문의 대도 끊어졌고 오스트리아 공작위의 자리도 비고 말았다.[6]

당시 오스트리아에게 대공위 시대가 찾아온 때는 마침 신성로마제국의 대공위 시대와 시기가 겹쳤으며, 오스트리아 지역은 중부 유럽 전체와 마찬가지로 극심한 정치적 혼란에 빠져들었다. 한편 지배 가문이 사라진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주도권을 잡은 세력은 보헤미아오타카르 2세였다.[7] 그러나 그가 1278년에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루돌프 1세에게 격퇴당하면서 오스트리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으며, 그 이후부터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몇 백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 하에 놓이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였던 스위스에서 반란이 일어나 스위스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 하에서 떨어져 나가자, 합스부르크 가문은 점차 오스트리아를 자신들의 본토로 여기게 된다.

14세기와 15세기 동안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 공국을 통치하며 주변의 국가들은 점차 흡수해나가며 힘을 길러나갔다. 1438년에는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알브레히트 2세가 신성로마제국의 독일 왕 지위를 획득한 후, 1452년 프리드리히 3세가 대관을 받아 정식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위를 독점하기 시작한다. 한편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황제에 오른 프리드리히 3세는 자신의 본거지였던 오스트리아 공국을 1453년에 오스트리아 대공국으로 승격시켰으며, 이후에는 제국의 유일한 대공국이라는 지위를 부여받아 기타 선제후국들이나 제후국들과 격을 달리하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 이때 오스트리아의 수도였으며 인구도 몇 만명에 육박했던 빈도 위상이 급격히 상승하였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군사적 정복이 아닌 결혼이나 혈연 관계를 통하여 영토를 넓혀갔는데, 1477년에 막시밀리안 1세 황제의 재위 시기, 합스부르크 가문은 과감한 결혼 정책 덕에 유럽 전역에서 엄청난 영토를 상속받아 유럽의 중심 가문으로 부상한 것이다. 1477년 부르고뉴 공국샤를 공이 스위스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후, 부르고뉴 공국은 그의 유일한 자녀였던 마리에게 상속되었다. 그러나 마리는 프랑스의 압박으로부터 공국을 지키기 위하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장남인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하였다. 이때 그녀의 영지인 부르고뉴 공국의 본토와 네덜란드를 펠리페 1세가 물려받으면서 이 영토가 그대로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왔다.[8] 한편 막시밀리안 1세와 마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펠리페 1세는 스페인 왕국의 이사벨 1세의 유일한 왕위 계승자인 후아나 왕녀와 결혼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은 스페인까지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었다. 펠리페 1세의 아들인 카를은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의 사망과 동시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였고, 기존의 합스부르크 영지와 함께 스페인 왕위에 오르며 카를 5세가 되어 유럽 중남부를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였다.

한편 막시밀리안 1세의 혈연을 통한 영토 확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막시밀리안 1세는 노년에 손자이자 카를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를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폴란드 일대의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던 야기에우어 왕조의 왕녀와 결혼시켰다. 그런데 1526년에 야기에우워 왕조의 러요시 2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이 영토들도 모두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상속되었다. 1521년에는 페르디난트 1세가 오스트리아 대공직을 물려받았으며, 1526년에는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의 왕위에 연달아 오르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이 세워졌다.[9] 페르디난트 1세가 새롭게 가지고 온 동유럽 영토들은 오스트리아의 국력 신장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오스트리아는 단숨에 중부 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중부 유럽의 최강국으로 떠올랐으며, 이 동유럽 영토들은 1918년에 오스트리아가 패전하여 해체되기 직전까지도 여전히 오스트리아의 뒷받침이 되어주었다. 다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은 느슨한 동군연합 체제였으며, 타 국가들과 달리 내부적으로 결속되어있지는 못했다. 이는 오스트리아인들이 제국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유달리 적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 부르고뉴 지방, 네덜란드는 곧 오스트리아와는 무관한 영토가 되었는데, 부르고뉴 공국은 카를 5세가 프랑스에게 넘겨주었으며 스페인, 네덜란드는 카를 5세가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상속시켜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분가하여 넘겨주었다.

1526년에 모하치 전투 이후, 오스만 제국이 차지하지 않은 보헤미아와 헝가리 지방이 오스트리아의 영토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지속적으로 헝가리 쪽으로 동진하며 팽창 정책을 펴나가자 결국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잦은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으며, 이후 약 백여년 동안 기나긴 전쟁을 이어갔다. 1529년에는 당시 오스만 제국의 최대 명군이었던 슐레이만 대제1차 빈 포위를 개시하였으나, 이른 겨울과 눈서리로 인하여 결국 실패하고 물러나기도 했다.

17, 18세기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1657년에서 1705년 동안 오스트리아를 다스린 레오폴드 1세의 시기 동안 오스트리아의 국력은 지속적으로 성장하였으며, 1683년에 폴란드의 왕인 얀 3세의 지휘 하에 1683년에 성공적으로 오스만 제국군을 막아낸 이후에는 적극적인 군사정책을 펼쳐 헝가리 영토의 대부분을 1699년의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오스트리아 영토에 편입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카를 6세는 오스트리아가 지난 세월 동안 얻어낸 영토 상당수를 포기하는 대신,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 정당한 세습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카를 6세는 1713년에 국사조칙을 발표하여 자신의 딸이었던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황위를 물려준다는 뜻을 밝혔으며, 1740년에 사망하였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 내에서도 여성에게 황위를 이어받게 하겠다는 카를 6세에 대한 반대의 뜻이 강했으며, 이때 서로 황위를 주장하기 시작하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터졌다. 이때 때마침 힘을 키우며 기회를 노리고 있던 프로이센 왕국슐레지엔 지방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침공했고, 결국 이때 오스트리아는 2차례의 전쟁으로 슐레지엔 지방을 상실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황위를 차지한 뒤 프로이센에게 복수를 준비하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선제 공격을 감행하여 1756년에 7년 전쟁을 일으켰다. 이때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에 맞서기 위하여 당시 루이 15세가 다스리고 있던 프랑스와 엘리자베타 여제가 다스리고 있던 러시아와 연합을 맺어 포위 전선을 구축하였다. 전쟁은 수적으로 우세했던 오스트리아와 그 동맹국 측에게 우세하게 흘러갔으나, 러시아에서 엘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고 독일 출신의 표트르 3세가 제위를 계승하자 러시아가 동맹에서 이탈하였고, 이를 시작으로 다른 동맹국들까지 철수해버리자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도 슐레지엔을 포기하며 프로이센과 휴전 협정을 맺었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약 30여 년 동안 프로이센을 본딴 개혁을 통하여 내정에 힘썼다. 한편 마리아 테레지아 이후의 합스부르크 왕가를 이전과 구분하여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라고 부른다.

19세기

1700년대 말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공화정의 열풍이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가자, 왕정제 철폐의 바람이 유럽에 미칠까 두려워한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연합군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끈 프랑스 혁명군에게 연전연패를 당하며 그 위상이 크게 깎여나갔다. 이후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제국을 세우자, 당시 로마의 황제를 자처하던 신성로마제국의 권위가 무색해졌고, 결국 1806년에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었고 대신 오스트리아 제국이 들어섰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배한 대가로 막대한 양의 영토를 프랑스와 그 동맹국들에게 나누어주어야만 했고, 1809년에 또 전쟁을 일으켰다가 다시 패배하며 막대한 배상금을 물었다. 한편 인적 피해도 엄청나서, 1792년부터 1801년까지 오스트리아는 약 754,700여 명에 달하는 전쟁 사상자가 나오기도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한편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프랑스가 휘청거리자, 유럽 내에서는 다시 프랑스 대혁명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한 목적으로 빈 회의가 1815년에 열렸고, 오스트리아의 주도 하에 독일 연방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독일인들도 점차 오스트리아의 간섭을 받아들이지만은 않았고, 오스트리아 본국과 독일 내부의 불화가 점차 계속 심해지자 1848년에 독일을 통일하고 오스트리아를 몰아내기 위한 혁명이 일어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는 혁명을 억누르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결국 1866년에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비스마르크 재상이 이끌던 프로이센에게 패배하면서 독일 내 영향력을 잃고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빼앗기며 물러나야 했다. 게다가 전통적 우방이던 바이에른 왕국마저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으며 오스트리아의 독일 내 영향력은 날로 축소되었다.

오스트리아가 독일 내에서도 영향력을 상실하고 위상이 예전같지 않자, 동부의 헝가리 지방에서도 독립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들의 목소리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자, 제국 정부는 헝가리 분리주의자들에게 이중 정부를 제안했고, 이 때 체결된 1867년의 대타협으로 인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설립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프란츠 요제프 황제를 유일한 황제로 모셨으나, 교회나 정부, 의회 등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서로 독자적인 체제를 유지하는 일종의 이중 제국이었다. 또한 다양한 슬라브계열 민족들, 크로아티아인, 체코인, 폴란드인, 세르비아인, 슬로바키아인, 우크라이나인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인, 루마니아인 등 다양한 민족들이 섞여 있는 다민족 제국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당시 막 떠오르고 있던 민족주의 열풍 때문에 심각한 고질적 내분을 겪게 된다. 내부의 민족들이 자신들끼리 독립해 나가려 끊임없이 시도했던 것이다. 제국은 비밀경찰을 확대하여 이들을 감시하기도 했으며, 8개 국어로 법령을 반포하고 학교와 공공기관에서 각 민족들의 모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을 허용하기도 하며 이러한 불화를 막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이 시기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강렬했던 민족주의 세력은 범독일주의 세력이었다. 몇몇 극단주의 세력들은 오스트리아의 독일계를 자극하여 오스트리아와 독일 간의 합병을 추진하기도 했으며, 일부 정치가들은 범독일주의 포퓰리즘을 통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려 시도하는 등 정계도 대단히 혼란스러웠다. 다만 당시 독일 내부를 주도하고 있던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류하는 것을 전혀 원치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오스트리아의 범독일주의자들은 독일의 빌헬름 1세가 가장 좋아한다는 꽃인 푸른색 수레국화를 단추에 꽂고 다니거나 독일의 상징색이었던 검은색, 붉은색, 노란색을 즐겨 사용하는 등의 방법으로 다민족 국가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히 표시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학교에서 이를 금지하고 범독일주의자들을 탄압하기도 했으나, 이들의 움직임을 완벽히 차단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범독일주의자들과 타 민족들 간의 갈등이 갈수록 심화되고, 국민들 사이에서도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고조되었다. 범독일주의자들은 최종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하고 이후에 독일에 합류하기를 바랐으며, 이 때문에 독일에게 협력을 요청하기도 했다. 게다가 범독일주의자 계열의 정치인들이 독일계 국민들에게 이탈리아의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나와 독일계 교회로 옮겨갈 것을 요구하며 사회 갈등이 종교에까지 미치니, 제국 내부의 상황은 갈수록 불안정해져만 갔다.

20세기

동쪽의 오스만 제국이 황제와 장교들 간의 싸움으로 점차 망조가 들어가고 그 국력이 현저히 약해지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때를 틈타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1908년에 합병한다. 그러나 이 합병은 인근의 세르비아 왕국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고, 1914년에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이 사라예보에서 페르디난드 대공을 암살하는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 간의 전쟁이 터졌다. 이 전쟁은 서로 간의 동맹국들 간의 참전을 통하여 결국 1차 세계대전이라는 재앙을 불러왔으며,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었으며 1백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전쟁에서 희생되었다.

민족들 간의 분쟁이 많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그 50년 동안 경제 성장과 근대화 및 민주화 개혁을 추진했다. 프로이센과의 주도권 싸움에서 패한 이후 발칸 반도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그 결과 1914년 6월 28일, 프란츠 페르디난트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을 암살한 사건인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났다.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914년 7월 28일에 세르비아 왕국에게 선전 포고함으로써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동맹국으로 참전하였으나 연합국의 승리로 패전되어 제국의 영토는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이탈리아, 폴란드에게 할양당하고 남은 영토마저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로 나뉘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사라지고 오늘날의 영토로 유지되었다. 1918년 11월 11일, 제국은 해체되고 공화국을 선포하여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이 탄생했다.

연합국 점령 아래의 오스트리아를 보여주는 지도
빈 유엔 사무국

1934년 제1공화국은 파시스트가 이 정권을 장악하여 오스트리아 연방국 성립으로 유지되었다. 1938년 3월 12일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로 진군했고 같은 해 4월 10일에는 오스트리아 병합을 선언했다. 1945년 나치 독일의 패망 이후에 나라를 되찾았으나 오스트리아 제2공화국으로 유지됨에 따라서 나치 독일의 일부로 패전국이 되었기 때문에 1955년까지 연합군에게 분할점령되었다. 1955년부터 현재까지 현재의 영토로 남아 1995년부터 유럽 연합의 회원국으로 있다. AIIBOECD의 창립 회원국이기도 하다.

오스트리아 국회의사당

2019년 9월의 오스트리아 국회의원 총선거(Nationalratswahl)에서 획득한 의석수를 기준으로 정렬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알프스 산지가 3분의 2로 되어 있다. 바다가 없는 내륙국이지만 노이지들러 호(Neusiedler See), 아터 호(Attersee), 트라운 호(Traunsee), 할슈타트 호(Hallstätter See), 첼 호(Zeller See), 독일, 스위스와 함께 공유하는 보덴 호(Bodensee) 등 큰 호수가 많다.

기후

게르만족 계통의 오스트리아인이 대부분이며, 대부분 독일어 (오스트로바이에른어)를 사용한다.

독일인 외에도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루마니아인, 체코인, 러시아인, 보스니아인, 기타 등의 동유럽인, 아랍인, 타이족, 터키인, 집시, 기타 민족이 거주한다.

오스트리아 육군

17세에서 51세까지의 남성은 징병제 대상이다. 2013년 징병제 유지 여부 국민투표가 있었으나, 찬성 59.8%, 반대 40.2%로 징병제 유지가 결정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역사적으로 서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다. 세계대전 이후 피폐해진 경제가 유럽 부흥 계획에 힘입어 1980년대까지 급속히 발전하였다.

이 나라의 1인당 GDP는 49,900 달러로 세계에서 24번째로 부유한 나라이며(CIA기준), 이는 유럽 국가 중 14번째로 높은 것이다.

유럽 NUTS 지역구분에 따르면 수도 은 유럽내 5번째로 1인당 GDP가 높은 도시이다.

무역

2017년 기준으로 오스트리아의 주요 수출 상대국은 독일(29.71%), 미국(6.60%), 이탈리아(6.25%), 스위스(5.22%), 프랑스(4.85%)이다. 주요 수입 상대국은 독일(36.54%), 이탈리아(6.09%), 중국(5.72%), 스위스(5.40%), 체코(4.30%)이다. 2017년 기준으로 총수출액은 159,971백만 달러, 총수입액은 166,475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 품목은 의약품(4,887백만 달러), 엔진(4,321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입 품목은 엔진(4,593백만 달러), 의약품(3,146백만 달러), 석유 제품(3,719백만 달러), 원유(3,046백만 달러), 천연가스(2,941백만 달러)이다.[11]

산업

산업별 국민총생산서비스업 65.8%, 제조업 32.3%, 농업 1.7%로 상대적으로 농업 의존도가 낮다. 이는 국토 대부분이 산지이고 임업 자원을 제외하면 부족한 지하자원 때문이다. 과거 석탄을 많이 생산했으나 최근에는 가격경쟁력의 저하로 광업이 대부분 비활성된 상태이다. 이 나라는 발달된 기술로 스와로브스키, 실루엣호화 상품을 생산하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와 음악을 간직한 도시를 보기위한 관광객이 쇄도하여 관광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관광업은 이 나라의 주산업으로 전체 GDP의 10%를 차지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지리상의 위치

오스트리아는 9개 연방주로 구성되어 있다. (안은 주도)

오스트리아는 수백년 간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는 동안 음악과 건축, 미술 등 문화·예술이 매우 발달하였다.

오스트리아 출신 노벨상수상자는 20명으로 인구당 노벨상 수상자는 세계 5위이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같은 아르누보 예술의 대표 화가를 배출해냈고 오토 바그너와 같은 대표적인 근대 건축가 또한 이 나라 출신이다. 아널드 슈워제네거, 아돌프 히틀러, 마리 앙투아네트, 쿠르트 괴델은 이 나라 출신이나 다른 국가의 국적을 얻거나 그곳에서 활동한 유명한 인물들이다.

종교

인구의 84%가 천주교를 믿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존재하였던 1918년까지는 국교였다. 물론 개신교도들도 존재한다. 현재는 인도네시아, 중동, 발칸 반도, 터키에서 이주한 정교회 신자들과 무슬림들의 영향으로 정교회, 이슬람교신자가 증가하고 있다.

언어

독일어가 공식적인 공용어이며, 지역적으로 슬로베니아어, 헝가리어, 크로아티아어가 쓰이고 있다. 이 나라는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참관국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가 되기도 했던 발칸 반도에서 이주한 사람들의 영향으로 알바니아어, 루마니아어, 세르비아어를 포함한 발칸 반도쪽의 언어도 많이 쓰인다. 러시아어영어도 쓰이지만, 영어쪽이 더 많이 사용된다.

철학

오스트리아는 국제적 명성을 가진 수많은 과학자들의 발상지이다. 19세기의 저명한 과학자로는 루트비히 볼츠만, 에른스트 마흐, 빅토르 프란츠 헤스, 크리스티안 도플러 등이 있고 20세기에는 핵 연구와 양자역학의 체계화에 기여한 리제 마이트너, 에르빈 슈뢰딩거, 볼프강 파울리, 현재의 양자물리학자인 안톤 차일링거는 최초로 양자 원거리 이동을 증명한 과학자이다.

물리학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는 20세기의 가장 주목할만한 철학자였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칼 포퍼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또한 멘델의 법칙의 생물학자 그레고어 멘델, 콘라트 로렌츠, 수학자 자동차의 설계자인 페르디난트 포르셰, 세계 최초 벤젠 연료 자동차를 개발한 지그프리드 마르커스 또한 오스트리아 출신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같은 근대 철학정신을 뒤흔든 심리학자 뿐만 아니라 알프레드 아들러, 폴 바츨라빅, 한스 아스페르거, 빅토르 프랑클 또한 오스트리아 출신 지성인이다.

예술

유명 오스트리아 화가로는 페르디난트 게오르그 발트뮐러, 루돌프 폰 알트, 한스 마카르트,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오스카어 코코슈카, 칼 몰,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 등이 있고 사진가로는 매그넘 최초의 여성 작가인 잉게 모라스, 에른스트 하스 등이 있다.

음악

유럽의 핵심 강대국으로서 갖추게 된 문화적 환경은 광범위한 형태의 예술에 큰 기여를 하게 됐는데 특히 음악이 바로 그 분야이다. 음악이라는 장르가 따로 있을 정도로 유럽 음악의 중심지인 오스트리아는 왈츠요들의 고장으로 낭만주의 음악, 바로크 음악, 궁정 음악 뿐만아니라 현대 음악과 같이 전 분야에 걸쳐 수많은 음악가들을 배출했다. 하이든, 모차르트, 슈베르트, 안톤 브루크너, 프란츠 리스트,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2세 등과 같은 유명한 작곡가들의 출생지이며 아주 오랜 기간동안 음악 혁신의 주요 중심지였던 수도 은 이들을 비롯 카를 체르니, 프리츠 크라이슬러의 활동지였다. 18, 19세기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원으로 여러 작곡가들이 비엔나에서 활발한 음악 활동을 할 수 있었고 이는 비엔나를 유럽 음악의 수도로 만들게 된다.

독일 출신의 루트비히 판 베토벤, 요하네스 브람스 등은 그의 대부분의 음악 인생을 비엔나에서 보냈다. 오스트리아 기존의 국가는 요제프 하이든 작곡의 곡이었으나 세계 2차 대전 이후 모차르트 작곡의 곡으로 변경되었다. 반면 현재 독일의 국가는 하이든이 작곡한 곡이다. 작곡가 뿐만 아니라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카를 뵘, 구스타프 말러,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같은 세계적인 지휘자도 배출해냈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이 나라의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이다.

다음은 오스트리아의 음악가 목록이다.

문학

예술가와 과학자들의 기회의 땅이었던 오스트리아는 언제나 시인과 작가, 소설가들을 위한 곳이었다.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 아르투어 슈니츨러, 슈테판 츠바이크, 토마스 베른하르트, 로베르트 무질, 시인 게오르크 트라클, 프란츠 베르펠, 프란츠 그릴파르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카를 크라우스도 오스트리아 출생으로 기반을 다졌다. 유명한 현대 극작가와 소설가로는 노벨 수상자이기도 한 엘프리데 옐리네크, 관객모독의 페터 한트케, 다니엘 켈만이 있다.

요리

오스트리아는 라틴, 게르만, 슬라브 음식 문화가 잘 어울려 독특한 음식 문화를 형성하였다. 음식 조리법과 음식에 있어서 가장 다양하고 복합적인 양식을 자랑한다.

비엔나 커피라고 불리는 아인슈페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나라의 대표적인 커피이며 고기를 튀겨 만든 슈니첼비엔나 소시지는 이 나라의 대표 음식이다.

이 나라는 과자가 특히 유명한데, 흔히 프랑스에서 유래된 것으로 오해하는 크루아상덴마크에서 유래된 것으로 오해되는 대니시 페이스트리는 오스트리아의 빵이다.

덴마크에서는 대니시 페이스트리를 '비네브뢰드'(빈에서 온 빵)라고 부르며, 프랑스에서는 크루아상을 '비에누아제리'라고 부른다. 이 외에도 브리오슈, 크레프, 브레첼, 팽오 레쟁(건포도 빵), 팽드 쇼콜라(초콜릿 빵) 등은 에서 유래하거나 발전했다.

  1. “Encyclopaedia Britannica”. 2021년 4월 7일에 확인함. 
  2. “Tabelle B.1.4. Im Ausland geborene Bevölkerung nach Geburtsland, Australien”. 2021년 4월 7일에 확인함. 
  3. “deutschland ist nach wie vor Messe- und veranstaltungsstandort nummer eins”. 《ATZ - Automobiltechnische Zeitschrift》 116 (1): 80–87. 2014년 1월. doi:10.1007/s35148-014-0021-2. ISSN 0001-2785. 
  4. Hummer, Waldemar (2017년 6월 30일). “La Participación de Austria en Schengen y Frontex – Una Retrospectiva Histórica”. 《REVISTA INTERNACIONAL CONSINTER DE DIREITO》 04 (04): 285–337. doi:10.19135/revista.consinter.00004.12. ISSN 2183-9522. 
  5. 《Johnson》. 19쪽. 
  6. 《Johnson》. 21쪽. 
  7. 《Lonnie Johnson》. 21쪽. 
  8. 《Lonnie Johnson》. 23쪽. 
  9. 《Lonnie Johnson》. 25쪽. 
  10. “Austrian Meteorological Institute”. 12 August 2012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12 August 2012에 확인함. 
  11. World Integrated Trade Solution World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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